그러니까, 같이 한 지 3년이 됐고, 한국을 벗어나 여행을 왔고, 지금은 숙소에 짐을 막 풀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막 씻고 나오던 참인데. 대체, 눈앞에 이 광경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 이대로 둘 거야?”


시하는 침대 위에서 누가 봐도 자신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모로 누워 치명적인 척하는 환희의 모습을 본 순간, 욕실에서 나오던 걸음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응? 자기야아.”


답지 않게 말꼬리까지 늘이면서 애교까지 부리는 모습. 거기다 손 키스라니. 3년, 아니 거의 4년을 봐온 시간 중에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거기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 이게, 대체.”


물론, 끌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이 익숙한 것이 아니었기에 시하는 양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시하가 미동도 하지 않고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서 있자 환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환희가 움직이면서 들리는 얇은 옷가지가 스치는 소리에 시하는 가리지 못한 귀까지 새빨개져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자기야. 이런 거, 싫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나긋한 목소리로 시하를 간질이는 환희의 말에 시하는 손을 내리고 환희를 내려보았다.


“응? 여보.”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극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오는걸. 아, 더는 참을 수가.


눈이 마주한 순간, 그토록 듣고 싶었던 호칭에 시하의 이성은 항복을 선언하고 그대로 환희의 입술을 덮쳤다.


허리를 끌어안고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듯, 몸을 빈틈없이 밀착했다. 한참의 키스가 끝나고 난 후에 방에서는 옅은 숨소리와 조금 달아오른 공기만이 느껴졌을 뿐.


시하는 말없이 환희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얇은 슬립 아래로 뻗은 다리는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큰 흉이 자리 잡았지만, 시하에게는 그것마저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읏, 자기야.”


고단한 노력 끝에 이제 휠체어 없이 걷게 되기까지 노력한 그 다리를, 시하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손끝으로 훑어 내렸다.


“왜 또 자기예요. 이제 우리 부부잖아요.”


“여, 여보.”


제가 뱉어놓고도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아까와는 다르게 붉게 물든 환희의 얼굴을 보면서 시하는 그저 빙긋 미소 지었다.


“맞아요. 내가 당신 여보에요.”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시하의 손길에 환희는 몸이 뒤틀렸다.


날마다, 밤마다 자신의 큰 흉터를 보면서 마음 아파할 시하를 위해서 없애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하는 오히려 자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흉터가 남은 자리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보기 힘들다면 지워도 괜찮아요. 나 때문이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건, 저한테 있어서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고 고생한 훈장과 다르지 않으니까.”


진심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며 위하는 시하의 말에 환희의 마음은 더 빠르고, 더 깊게 시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행동들은 둘만의 시간을 시작하는 의식처럼, 지금도 시하의 손길이 지난 그 자리에 살포시, 조심스럽게 다가온 시하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


채가는 단아의 지휘 아래 철저히 분리되고 해체되어 이제 채가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쌍둥이 자매에게 남은 각각의 기업체들은 서로 이름을 바꿨고, 단아는 모든 것이 마무리되면서 건설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환희는 재활을 핑계 삼아 돈 많은 백수로 지내고 있었고, 시하는 다시 매체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피아노, 계속할 거죠?”


휠체어에 앉은 시간 동안, 재활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시하는 피아노와 다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환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본 질문에 그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환희가 좋아하는 곡을 칠 뿐이었다.


가느다랗지만, 아름다운 선율이. 가녀린 듯, 단단한 음색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연주가 시하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뿐이라고. 이제, 당신을 위해서만 연주하고 싶다는 그런 메시지를 담아서.


가끔은 단아와 차연을 불러서 저녁을 먹다가 연주하기도 하고, 재활 훈련을 하고 난 뒤에 지쳐있는 환희를 재우기 위해서 연주하기도 하는, 그런 내 사람을 위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시하는 얘기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을 쪼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리고, 아직 난 해고되지 않았어요."


지현과 맺었던 구두계약이 여전히 파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시하는 그렇게 웃을 뿐이었다.


서로를 달아오르게 하는 소리만 가득한 방에서도 환희는 시하의 연주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피, 읏. 피아노, 계속.”


“쉬. 지금은 그저 나한테만 집중해요. 나, 지금도 연주 중이에요.”


시하의 손은 말하는 것처럼 환희의 몸을 연주하고 있었다. 건반을 누르듯, 민감하고 예민한 곳을 부드럽게 누르기도, 쓰다듬기도, 매만지기도 하면서. 그런 움직임에 나오는 소리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예쁜 소리가 울린다고, 그 소리에 다른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듯. 시하는 더 빠르게 손을 놀렸다.


*


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별다른 일정 없이 그저 방에 머물렀다가 바닷가를 산책하는 일만을 반복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면서 환희는 조금씩 혼자 외출하는 시간을 늘리기도 했다.


“나 왔어요.”


“어디 갔다 와요?”


시하의 물음에도 환희는 그저 빙긋 웃을 뿐, 대답은 잘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다름없는 두 사람의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하는 시하를 환희가 끌어안았다.


“우리 곧 돌아가는데, 이 시간에 밖에 나가본 적 없잖아.”


“그렇긴, 한데. 힘들지 않아요?”


걸을 수 있게 됐고, 몸도 많이 회복됐다고는 하지만. 시하에게는 늘 환희의 몸이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은 접어두라는 듯, 환희는 환하게 웃으면서 시하를 잡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저물어 어두운 바닷가는 시원하지만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래도 찝찝하지 않은, 함께 있는 사람의 냄새가 물씬 배어나는 바람에 시하는 그 바람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어때? 이 시간에 나오는 것도 꽤 좋지 않아?”


“응. 좋아요. 바람이 꽤 상쾌해.”


환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하의 손을 잡고 자신의 손가락과 얽어 깍지를 끼우며 꼭 잡았다.


“이제,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래요. 우리 떨어지지 말아요.”


“그리고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환희의 덧붙인 말에 시하는 작게 웃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지고 싶어도 이제는 헤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미저리보다 더한 거머리가 붙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건지.


“헤어지게 두지 않아요. 우린 서로에게 운명의 실을 걸었잖아요.”


애정이라는 이름의 집착을 가진 거미줄을 끊고, 서로에게 남은 실을 맞붙였으니까요.


“언제 그런 걸 걸었지?”


환희는 괜히 모른 척, 손을 풀고 앞서 나갔다. 그 모습에 시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요라고 덧붙였다.


“아, 다 왔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의 바깥쪽에 자리한 방갈로가 보이자 환희가 그 앞으로 속도를 냈다.


아직 달리기는 무리가 있을 텐데도, 환희는 개의치 않는 듯. 방갈로를 향해 달렸다.


“환, 환희씨!”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시하도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해변은 모래로 가득했기에 걷는 것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밖에 나질 않았다. 방갈로 안으로 들어간 환희가 품에 가득 안은 꽃다발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기 전까지, 시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 건?”


“그동안, 여태까지 나를 보살펴주느라 너무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큰 꽃다발을 시하에게 내밀며 안겨주자 환희는 다시 뒤돌아서서 방갈로 안으로 시하를 이끌었다.


"아."


방갈로 안으로 들어온 시하는 넓은 공간 안에 자리 잡은 피아노를 보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둘이 함께하는 집에 있는 것보다는 작지만, 잘 관리된 피아노. 환희가 그 앞에 서서 시하를 바라봤다.


시하는 그런 환희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움직여 환희의 옆에 섰다.


시하의 손을 잡아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환희는 의자에 앉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법 익숙한 음악이 울렸다.


"지금의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이야."


난 행복합니다. 내 소중한 사랑. 그대가 있어 세상이 더 아름답죠. 난 행복합니다. 그대를 만난 건 이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인 거죠.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우릴 갈라놓을지라도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삶이 끝날지라도.


종종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시하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늘 부끄럽다며 피하던 환희는 최선을 다해 건반을 누르고 노래를 불렀다.


난 행복합니다. 내 소중한 사랑. 그대가 있어 세상이 더 아름답죠. 난 행복합니다. 그대를 만난 건 이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인 거죠.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우릴 갈라놓을지라도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삶이 끝날지라도.


기억해요. 당신만을 나 사랑할게요. 나 언제까지나.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우릴 갈라놓을지라도

나의 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삶이 끝날지라도.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재훈-사랑합니다)


중간중간 조금은 더듬기도 하고, 가끔은 음 이탈도 나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불러주는 노래가 끝나자 환희는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으. 이렇게 하려던 게 아닌데.”


자신이 정한 중요한 순간과 분위기에 나온 실수가 안 그래도 쑥스러운 마음에 부채질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았는지 환희는 짧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시하와 눈을 맞추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시하의 품에 있던 꽃다발을 가져와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말 남들 하는 것 다 따라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 노랫말처럼 나한테 있어서 너를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고 선물이야. 그래서, 그래서 이것 하나만은 정말 내 심장에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시하의 왼손을 제 입가로 당겨와 반지 위로 입술을 살포시 얹었다가 떨어트렸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만을.”


환희의 말에 시하는 대답 없이,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굳어있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굳어있는 시하를 보며 환희는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으로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시하는 잡힌 손을 빼내고 환희를 조금 지나쳐 환희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른 말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아, 이거 자주 듣던 음악인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시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시하의 연주는 따로 가사가 없어도 환희에게 고맙다고,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답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네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인데. 다른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인데.”


같이 지내 온 시간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끝까지 당신 하나만을 고집할 거라고.


“그러니까, 정말 도망칠 수 없을 거예요.”


시하의 이어진 말에 환희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이제 너 없는 내 인생은 더 웃을 수 없을 것 같거든.”


환희는 연주를 끝마친 시하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보이는 뺨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뗐다.


“사랑해.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지나갈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만은. 너한테 했던 이 말만큼은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환희의 말에 시하는 미소를 지으며 환희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이마를 마주 대고 눈을 감았다.


“변해도 괜찮아요. 변하면 변하는 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시하의 얼굴이 조금 위로 향해 환희의 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옭아매던 것에서 풀어줬던 그때부터, 나는 이미 당신을 향해서 멈출 수 없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에 환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시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시하는 다시 가볍게 손가락으로 환희의 입술을 훔쳤다.


“이제 당신이 먼저 나한테 영원을 얘기할 정도로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아, 예쁘다.


웃으며 얘기하는 시하의 모습에 환희는 마치 빛에 이끌린 듯, 시하를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빌어주었던 동화의 끝말처럼, 앞으로도 긴 시간을 함께해 줄 이 사람과의 미래가 오래오래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우리의 미래는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 해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처럼, 시원하지만 포근한 바람이 환희를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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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사랑을 약속하는 여행으로 환희와 시하 이야기는 정말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시하가 연주한 곡은 이적의 다행이다 이구요ㅎ 그냥 두 곡은 제가 자주 듣던 노래들 중에서 골라봤습니다😅


마무리가 흡족하셨을지 모르겠어요. 사실 애정씬이 더 짙으면 좋겠지만 전 아직 그런게 수줍어서(읽는 것은 무척 좋아합니다|´▽`●)ノ)


연재라고 하기에 무색할만큼 텀이 길어서 기다리고 읽어주셨던 분들께 항상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다음은 은호와 루아 이야기 중 은호부터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딱히 쉬는 타임을 가질만큼 성실하지 못했던 사람이라... 은호도 곧 다음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환희를 아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항상 행복하세요💕

GL러버💕 읽는 것에 환장하고 쓰는 것을 좋아해요🦊💕 onlyonedayS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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